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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종교,의식,토속신앙

개신교(기독교) 교회

by Dr.Sombuun 2022. 4. 24.

라오스에서 기독교인은 어느정도일까?
2015년 라오스 인구 센서스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하지만 라오스 기독교 관계자에 따르면 2022년 현재 기독교인은 250,000명(약 3.3%), 교회는 약 1,500개가 있다고도 한다. 또한 헌금이 200만킵/주 이상 들어오면 담임 목사에게 최대 80만킵/월의 사례비를 드릴 수 있다고 한다. (2022년)


라오스 개신교 역사를 살펴보면 북부, 서부, 중남부 지역의 여러 방면에, 여러 상황에서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볼 수 있다. 북부는 다니엘 멕길버리(Daniel McGilvary) 선교사를 통하여, 서부는 태국에서 복음을 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라오인들에 의하여, 중남부는 스위스형제단 선교사들을 통하여 복음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뒤늦게 합한 C&MA(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단체는 중북부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공산화 이후에는 라오스 정부로부터 공인 된 유일한 교단(LEC, Lao Evangelical Church, ສູນລວມ, 쑨루암)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라오스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는 어디일까? 지금까지는 북부 우돔싸이도(道)의 크무족 마을에 있는 왕몬교회로 보고 있다. 이 교회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여러 증인들과 자료에 의하면 1880년대로 보고 있다. 그러면 누구에 의해서 이곳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시작되게 되었는가? 다니엘 멕길버리(Daniel McGilvary, 1828-1911) 선교사이다. 그는 1858년에 미국 노스케롤라이나 오렌지 카운티 장로교에서 파송받아 씨암(태국) 선교사로 53년간을 사역하였다. 특히 44년 간 오늘날의 태국 북부 지역에서 살며 선교하다가 1911년 치앙마이에서 별세하였다. 방콕에서 언어와 문화를 익히고 사역을 시작할 즈음에 북부 지역인 치앙마이의 왕자를 만나고, 강제 노역 중이던 라오인 포로 집단을 접촉하게 된 것이 라오인에 대한 관심이 불타오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씨암 북부는 라오스와 국경에 대한 분명한 경계선이 없었다(오늘날의 라오스와 태국의 국경선은 프랑스가 라오스를 식민지배한 이후 1893년 씨암과 프랑스의 조약에 의해 정해졌다). 그는 라오인을 선교하기 위해 라오인이 거주한다고 생각한 북부 지역에 가서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아가며 문화적, 종교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은 멕길버리 선교사에게 복음의 열매가 서서히 맺혀졌다. 그는 1867년에 라오 선교부를 치앙마이에 세우고 계속적으로 라오 선교를 시도하였다. 그는 그의 사역(교육, 의료 등)을 새로 온 적임자들에게 맡기며 시간 날 때 마다 선교 순회 여행을 떠났다. 람빵, 프래, 난, 치앙라이, 핏사눌록까지 태국 북부 전 지역을 다녔고, 미얀마 지역의 샨주, 중국의 운난성, 그리고 씹쏭빤나와 오늘날의 라오스 지역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때로는 의료 선교사와 함께 배를 타고 메콩강을 따라 가며 강변 유역의 주민들을 만났고, 코끼리를 타고 밀림을 헤쳐가며 육로로 다니면서 산에 사는 부족들을 접촉 하였다. 당시 그의 순회 선교로 복음을 받아들인 라오스 초대 교인들이 있었고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멕길버리 선교사는 이들의 신앙생활 지도를 위해 씨암에서 베트남인 전도인을 보내주었다. 그 교회가 라오스에서 최초의 교회로 추정되는 왕몬교회이다. 교회 지도자가 순교를 당하는 등 많은 고난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두 번째로 살펴볼 곳은 라오스 서부인 싸이냐부리도(道)에 복음이 전파된 내용이다. 이 지역은 한국 즉 조선 말에 전파된 개신교 역사와 매우 흡사하다. 당시 조선의 서북부 지역인 함경도와 평안도의 사람들이 돈벌이를 위해 만주에 가 있거나, 만주로 가는 길에 아프거나 재난을 당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곳에 있었던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후에 이들은 선교사를 도와 성경번역 등을 하다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이웃을 복음화 하고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1925년 라오스의 서부인 싸이냐 부리 도(道)의 쯔아와 크무족인 툰씨가 태국의 난도(道)에 가서 장사를 하다가 그곳의 전도인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이후 이 두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와 전도하여 마을 사람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 마을인 후아이 싸우에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이후 난도(道)에 성경을 가르쳐주고 영적인 삶을 인도해 줄 교역자를 요청하여 아짠 분타가 와서 상주하며 신앙을 지도하여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후 일본의 점령과 공산화가 되면서 교회는 많은 박해를 받고 해체와 재건이 계속되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안타깝게 싸이냐부리도(道)에는 현재 공식적인 교회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믿음의 후손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있다. 

 

세 번째로 중남부 지역에 있었던 복음 전파의 내용이다. 1902년에 베트남을 통해 들어온 스위스형제단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북부지역과 서부 지역과는 달리 중남부 지역은 선교사가 정착하고 현지인과 함께 살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당시 라오스는 베트남, 캄보디아와 함께 인도차이나 프랑스 식민 지배하에 있었다. 스위스 형제단은 불어를 하는 가브리엘 꽁텟(Gabriel Contesse)을 선교사로 훈련시켜 파송하였는데, 그는 모리스 윌리(Maurice Willy)와 함께 9월 4일 제노아에서 출발하여 베트남 사이공(호치민시)에 도착하였다. 그 곳에서 여러번 배를 갈아타고 메콩강을 거슬러 캄보디아를 거쳐 10월 30일에 라오스에 도착하였다. 일행이 정착한 곳은 지금은 싸완나켓도(道)에 속한 조그만 시골 마을이지만 당시는 그 지역의 중요한 행정관청과 군대가 주둔해 있었던 썽컨(ສອງຄອນ) 지역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 미혼이었던 선교사가 결혼도 하고 다른 신임 선교사들이 합류함에 따라 그 조직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이들은 팀 사역을 통해 의료사역, 구제사역, 성경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그 결과 점차 많은 현지인들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세례받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1906년 티벳에서 발병하여 라오스 북부를 거쳐 중부까지 내려온 전염병(이질 또는 콜레라 라고 함)으로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다. 가족, 친척들도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병에 전염된 사람을 버리고 마을을 떠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선교사들과 교인들은 끝까지 남아 병든 사람을 치료하며 그들과 함께 하였다. 이 와중에 이 지역에 온 최초의 선교사 꽁텟 부부도 전염되어 같은 날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현재 썽컨교회 앞에는 5기의 묘가 있는데 꽁텟 부부, 복통으로 사망한 윌리부인, 1932년에 라오스어로 된 신구약 66권을 최초로 번역 제작한 오뎃따의 부인 그리고 시신을 찾지 못해서 가묘를 한 오뎃따의 아들의 묘이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는 터툴리안의 말과 같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어 라오스 중 남부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현재 썽컨교회가 있는 마을 입구에서 엄격한 검문이 실시되고 있어 외부인이 방문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썽컨 교회는 지금도 마을 사람 전체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며, 인구가 많을 때는 교인들의 숫자가 2,000명에 육박했었다고 한다.

 

현재 라오스 정부로부터 공인 받은 교단은 복음교단(Lao Evangelical Church) 이다. 이 교단은 미국 선교 단체인 C&MA의 영향을 받았다. 이 단체는 1911년 베트남을 시작으로 캄보디아를 거쳐 1928년 라오스에 선교사가 들어와 정착하였다. 이미 중남부 지역은 스위스 형제단이 정착하여 활발히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협의 하에 C&MA는 그 위의 지역을 복음화하기로 하였다. 공산화되기 전까지 이외에도 많은 단체와 교단이 들어와 선교를 하였고, 상황화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복음은 확산되었다. 성경이 번역되고 지도자 배출을 위한 신학교 사역 등을 통하여 많은 결실을 거두었다. 그러나 1975년 공산화 이후 기독교와 목회자들, 성도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고, 예배당과 신학교 건물은 압수되었다. 수도 위앙짠의 나싸이 교회(ຄຣິສຕະຈັກ ຂ່າວປະເສີດນາໄຊ)는 1975년 공산화 이후 정부에 의해 압류되었으나 1993년에 30만불을 주고 되찾아 매주 500~600명이 뜨겁게 예배하고 복음을 증거 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라오스의 개신교인은 전체 인구의 2% 내외로 보고 있으며 전국에 약 950여 교회(가정교회 포함)가 있다고 한다.

 

<출처>

- 라오스 지역연구회, "큐! 라오스", 2015

 


 

https://laostudy.tistory.com/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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